제목 피로사회 (2012) 저자 한병철 출판 문학과지성사
장르 인문/사회, 심리
기간 2025.01.12
평점 4 / 5
계기
대학교 1학년 시절 교양 수업 중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책이다. 70페이지 가량의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어려운 한자어가 많고, 문장 구조가 복잡하여 쉽사리 읽지 못하고 한동안 포기했었다. 많은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 또한 진입 장벽이 되었다. 이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책을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요약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치며, 금지·강제·규율·의무 등 부정적인 키워드가 주도하는 면역학적 부정성 패러다임 시대였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맞이한 21세기는 능력·성과·자기주도·과잉 등 긍정성의 패러다임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
20세기에는 전쟁, 기아, 전염병과 바이러스 등 적대성 폭력 문제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더 이상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문제들이 나타난다. 현대에 급증한 우울증·ADHD·과민증 등의 심리적 질병이 그 예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양극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발생한다. 오늘날 우리는 타자(외국·타 문화 등)에 대한 공포를 점점 덜 느끼며, 세계는 물리적·심리적으로 통합되어 간다. 이로 인해 박탈과 배제 문제 대신, 포화와 고갈 문제가 두드러지고, 이는 곧 시스템적 폭력으로 변모한다.
20세기의 규율 사회는 “Do Not”이라는 키워드로 개인을 복종적 주체로 만들며, 범죄자를 만들어 낸다. 21세기의 성과 사회는 “Can”이라는 키워드로 개인을 성과 주체로 만들며,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든다. 우울증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발병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 즉, 성과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현대의 성과 사회는 본인만이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누구나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그 자유 속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낙오되고 도태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유롭지만 과도한 노동에 매달리며 성과를 내려 끈임없이 노력한다. 즉,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결국 모든 개인이 착취자이자 피착취자가 된다. 이 때문에 개인은 스스로를 한계까지 착취하다 에너지를 소진하고, 심리적 병에 이르게 된다.
또한 저자는 노동(업무) 부담의 증가가 멀티태스킹의 증가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멀티태스킹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색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이는 곧 정신적 이완을 막는다. 사색 중심 주의는 점점 과잉 주의로 대체되고, 부산한 자가 오히려 고평가 받는 비정상적 사회가 되어 간다.
활동 과잉 시대에는 분노하는 법 또한 잊혀진다. 분노는 부정성의 에너지이며 새로운 국면을 열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긍정성이 만연해지며, 이질성(분노)이 들어설 여지가 희미해지고 있다. 이는 “계속 생각해나가는”태도만을 허용하고, “돌이켜 생각하기”를 막아선다. 긍정적 힘의 절대화는 역설적으로 극단적 수동의 형태인 활동 과잉을 초래한다는 뜻이다.
감상평
저자는 왜 현대 사회에서 정신적·심리적 질병들이 더 많이 발병하는지에 대해, 변증법적 접근과 다양한 예시를 통해 명확하고 깔끔하게 설명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두루뭉술하게 인식해왔던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저자는 긍정성의 과잉과 자기착취, 성과주의의 압박 아래에서 개인이 어떻게 우울증이나 번아웃에 빠지는지를 논리적으로 짚어내었고,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설득력 있게 드러냈다. 특히 "너무 많은 자유가 오히려 우울감에 빠지게 만든다" 는 부분은, 자유라는 긍정적 가치가 어떻게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줘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양극화가 줄어들고 긍정성의 과잉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모든 부정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결국 부정성과 긍정성이 양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세대·남녀·지역·좌우·빈부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극심한 양극화를 겪으며, 상호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동시에 성과주의와 능력주의, 정보 과잉 문제도 심각해지면서 우울증이나 번아웃 등 심리적 질병을 겪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제시하는 긍정성 과다에 대한 해결 방안이 추상적이고, 철학적 성찰에 머무른다는 아쉬움이 있다. 사색과 분노, 피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다 보니, 과잉 성과와 자기 착취를 부추기는 사회 구조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해결 방안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무한 경쟁이 펼쳐지는 현대 사회에서 모든 개인이 저자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